민지는 메뉴판을 내 쪽으로 밀었다.
“뭐 먹을래?”
나는 파스타 두 개를 번갈아 봤다.
“너 뭐 먹을 건데?”
“난 토마토.”
“그럼 나도 그거.”
“또 같은 거?”
“오늘은 그게 맛있어 보여.”
직원이 주문을 받으러 왔다.
민지는 토마토 파스타를 주문했다.
나는 메뉴판을 덮고 말했다.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민지가 웃었다.
“다음번엔 네가 먼저 골라.”
“알았어.”
엄지로 휴대폰 옆면을 한 번 문질렀다.
파스타는 맛있었다.
그 문장이 처음 뜬 날에는 비가 오지 않았다.
출근하려고 신발을 신었을 때였다.
휴대폰 화면 위에 처음 보는 알림이 하나 떠 있었다.
우산을 가져가는 편을 권장합니다.
날씨 앱에는 해 그림이 떠 있었다.
창밖도 밝았다.
현관 구석에 접이식 우산이 있었다. 잠깐 봤지만 그대로 나왔다.
퇴근할 때까지 비는 오지 않았다.
저녁에 집으로 돌아와 신발을 벗다가 아침의 알림이 생각났다.
나는 기록에 남아 있던 문장을 다시 열었다.
“틀렸네.”
몇 초 뒤 새로운 문장이 나타났다.
맞습니다.
나는 웃었다.
“그렇게 쉽게 인정한다고?”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나는 그날 처음으로 화면에 말을 걸었다.
그 뒤로 문장은 가끔 나타났다.
매일도 아니었고 정해진 시간도 없었다.
처음에는 사소한 것들이었다.
8시 12분 출발을 권장합니다.
평소보다 십 분쯤 늦은 시간이었다.
별 이유 없이 기다려봤다.
8시 12분에 집을 나와 역에 도착했을 때, 평소 내가 탔을 열차가 앞 역에서 멈췄다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승강장은 사람들로 차기 시작했다.
나는 반대편 출구로 나가 버스를 탔다.
회사에는 늦지 않았다.
며칠 뒤 운동화를 사려고 결제 버튼을 누르던 순간에는 이런 문장이 떴다.
지금 구매하지 않는 편을 권장합니다.
이번에는 따랐다.
다음 날 같은 운동화의 가격이 삼만 원 내려갔다.
나는 전날 가격과 바뀐 가격을 나란히 캡처해서 민지에게 보냈다.
— 전에 말한 그거 있잖아 — 좀 신기한데
민지가 답했다.
— 그래서 그때 깔았다는 거 계속 쓰고 있어?
— ㅇㅇ
— 난 그런 거 귀찮아서 못 쓸 듯
그게 전부였다.
그날 밤에는 민지에게 길게 써놓은 메시지가 있었다.
회사 이야기를 하다가 지난번 민지가 했던 말이 조금 기분 나빴다는 데까지 갔다. 쓰다 보니 내가 왜 이 말을 하려는지도 잘 모르겠어졌다.
전송 버튼 위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민지에게는 내일 답장하는 편을 권장합니다.
나는 보내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다시 읽어보니 보내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절반을 지웠다.
또 절반을 지웠다.
결국 이렇게 보냈다.
— 어제 좀 피곤했나 봄 ㅋㅋ 이번 주말에 볼래?
민지는 바로 답했다.
— ㅇㅇ 토요일
오후에는 다른 문장이 나타났다.
직접 고르고 싶으면서, 누가 대신 정하면 안심한다.
“뭐야.”
나는 웃었다.
문장을 지우려다가 다시 한번 읽었다.
직접 고르고 싶으면서.
누가 대신 정하면 안심한다.
조금 기분이 이상했다.
정확한 것 같아서였다.
그 문장은 내가 알고 있던 나보다 나를 조금 더 잘 아는 것처럼 보였다.
오후 네 시 십칠 분에 엄마에게 전화하라는 문장이 떴다.
오늘은 어머니에게 먼저 연락하는 편을 권장합니다.
회의실에서 자리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왜?”
잠시 뒤 작은 글씨가 붙었다.
최근 통화 간격을 고려했습니다.
통화 기록을 확인했다.
마지막 통화가 열흘 전이었다.
나는 창가에 서서 전화를 걸었다.
세 번째 신호음에 엄마가 받았다.
“어.”
“뭐 해?”
“뭐 하긴. 밥하지.”
뒤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너 밥 먹었어?”
“아직.”
“또 안 먹었지.”
“먹을 거야.”
“김치 있어?”
“있어.”
“얼마나 남았는데?”
나는 냉장고 안을 떠올려봤다.
“조금.”
“거짓말.”
엄마가 웃었다.
아빠가 며칠째 허리가 아프다는 이야기, 이모네 보일러가 고장 났다는 이야기,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친척의 결혼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별일은 없었다.
통화를 끊으려는데 엄마가 말했다.
“근데 오늘은 웬일로 네가 먼저 전화했어?”
나는 화면을 내려다봤다.
아까의 문장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그냥 생각나서.”
“별일 없고?”
“응.”
“그래. 밥 챙겨 먹어.”
통화가 끝났다.
나는 몇 초 동안 휴대폰을 손에 들고 있었다.
“고마워.”
아무런 답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대답을 들은 기분이 들었다.
새 프로젝트 이야기는 월요일 오전에 나왔다.
팀장은 내가 회의실에 들어가기도 전에 의자를 가리켰다.
“이번 거 네가 한번 맡아볼래?”
규모가 지금까지 했던 것보다 컸다.
다른 팀 사람들을 조율해야 했고, 마지막 발표도 내가 해야 했다.
“생각해보고 말씀드려도 돼요?”
“내일까지.”
자리로 돌아오는 동안 가장 먼저 든 생각은 하나였다.
하고 싶었다.
그다음에는 하지 않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후 내내 프로젝트 자료를 읽었다.
흥미로웠다.
잘못될 수 있는 일도 많아 보였다.
퇴근하면서 엄마에게 이야기했다.
“회사에서 좀 큰 거 맡으라는데.”
“힘들어?”
“아직 모르지.”
“요즘도 늦게까지 하잖아. 너무 힘들 것 같으면 안 해도 돼.”
집에 가는 길에는 민지에게 전화했다.
“나 이번에 프로젝트 하나 맡을까 하는데.”
설명을 들은 민지가 말했다.
“재밌어 보이네.”
“그치?”
“응. 근데 넌 이미 하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그래 보여?”
“조금.”
엄마의 말도 맞았고 민지의 말도 맞았다.
둘 중 하나를 들으면 다른 하나가 생각났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웠다.
휴대폰을 켰다.
아무 문장도 없었다.
내가 먼저 물었다.
“너는?”
몇 초 뒤 화면이 바뀌었다.
수락을 권장합니다.
그 아래 처음 보는 숫자가 있었다.
예상 만족도 91.3%
“높네.”
다음 날 나는 프로젝트를 맡겠다고 했다.
세 달 뒤에는 그것이 회사에 들어온 뒤 내가 가장 잘한 일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어렵기는 했다.
회의를 정리하는 것도, 사람들에게 일을 요청하는 것도 처음에는 불편했다.
발표 전날에는 새벽까지 자료를 고쳤다.
그런데 잘했다.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잘했다.
최종 발표가 끝난 뒤 팀장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이런 거 잘하네. 왜 진작 안 했어?”
나도 몰랐다.
내가 이런 일을 좋아한다는 것까지도.
프로젝트가 끝난 날 문장이 하나 나타났다.
자신을 믿고 싶어서, 확신을 줄 사람을 계속 찾는다.
조금 얄미운 문장이었다.
그래도 맞았잖아.
결과가 좋으면 누가 먼저 등을 밀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 같았다.
민지와 다시 저녁을 먹었다.
“뭐 먹을래?”
민지가 물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휴대폰을 켰다.
“오늘 뭐 먹지?”
민지가 내 손을 봤다.
잠시 뒤 문장이 나타났다.
생선 요리를 권장합니다.
“난 생선.”
“방금 그거한테 물어본 거야?”
“응.”
“메뉴도?”
“응.”
민지가 메뉴판을 한 장 넘겼다.
“요즘 나랑 있을 때도 자주 보더라.”
“폰을?”
“그거.”
나는 웃었다.
“왜. 잘 맞아.”
“그래서 싫다는 건 아닌데.”
민지는 빨대 끝을 이로 조금 눌렀다.
“전에는 나한테 물어봤잖아.”
“메뉴를?”
“메뉴도 그렇고.”
“지금도 물어보잖아.”
“요즘은 물어보고 나서 저걸 보는 것 같던데.”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민지가 메뉴판을 덮었다.
“얘가 나보다 나를 잘 알아.”
내가 농담처럼 말했다.
민지가 웃었다.
아주 조금.
“그러면 넌 뭐 하는데?”
“먹지.”
이번에는 둘 다 웃었다.
잠시 뒤 민지가 자기 회사에서 새로 온 사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도 프로젝트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생선은 맛있었다.
야근이었다.
저녁은 샌드위치였다.
커피는 마시지 않았다.
열 시 전에는 끝내는 편이 좋았다.
파일 하나를 더 확인했다.
메일을 보냈다.
9시 48분.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화면 위로 문장이 겹쳤다.
지금은 받지 않는 편을 권장합니다.
통화 거절 버튼을 눌렀다.
파일을 다시 열었다.
엄마에게는 내일 전화하면 됐다.
다음 날 아침에는 이런 문장이 떠 있었다.
오후 4시 이후 연락을 권장합니다.
확인하고 화면을 껐다.
회의는 열한 시였다.
점심은 한 시.
수정본은 세 시 반까지였다.
2시 37분에 아빠에게 전화가 왔다.
“어.”
“너 지금 회사야?”
“응. 왜?”
잠깐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났다.
“엄마가 쓰러졌어.”
어느 병원인지 두 번 물었다.
자리에서 가방을 집었다.
택시를 불렀다.
엘리베이터가 늦게 왔다.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동안 아빠와의 통화 기록을 다시 열었다.
14:37
손가락으로 숫자를 한번 눌러봤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병원 복도는 너무 밝았다.
소독약 냄새가 났고, 자판기 옆 쓰레기통에는 찌그러진 종이컵이 몇 개 쌓여 있었다.
엄마는 의식이 있었다.
검사를 더 해야 했지만 당장 위험한 상태는 아니라고 했다.
아빠는 의자에 앉아 한쪽 무릎을 계속 흔들었다.
나는 자판기에서 물을 뽑았다.
종이컵에 받아 한 모금 마셨다.
미지근했다.
화장실에 간다고 말하고 복도 끝으로 갔다.
사람이 없는 곳에서 휴대폰을 켰다.
“왜 받지 말라고 했어?”
잠시 뒤 문장이 나타났다.
당시 조건에서는 통화하지 않는 편을 권장했습니다.
“왜?”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전화를 받았으면 어떻게 됐는데?”
기다렸다.
“달라졌을 수도 있잖아.”
화면은 그대로였다.
“알아?”
몇 초 뒤.
알 수 없습니다.
나는 그 문장을 오래 바라봤다.
처음 틀렸던 날에도 그랬다.
틀리면 틀렸다고 했다.
모르면 모른다고 했다.
전에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전원 버튼을 눌렀다.
검게 변한 화면에 내 얼굴이 잠깐 비쳤다.
화면이 꺼진 뒤에도 휴대폰을 내려놓지는 않았다.
엄마는 며칠 뒤 일반 병실로 옮겼다.
약을 먹고 생활 습관을 조금 바꾸면 된다고 했다.
큰일은 아니었다.
엄마는 병원 밥이 맛없다고 했다.
내가 사 온 죽도 반쯤 먹고 남겼다.
“엄마.”
“응.”
“그날 나한테 전화했잖아.”
“언제?”
“쓰러지기 전날 밤.”
엄마는 숟가락을 든 채 생각했다.
“내가?”
“응.”
“아.”
다시 생각했다.
“김치 다 먹었나 물어보려고 했나.”
“그거 때문에?”
“아닌가.”
엄마가 고개를 갸웃했다.
나는 기다렸다.
“뭐였지.”
결국 엄마가 웃었다.
“별 얘기도 아니었어.”
그리고 물을 달라고 했다.
나는 종이컵에 물을 따랐다.
엄마가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퇴원하면 김치 줄 테니까 가져가.”
“많이 주지 마.”
“너는 항상 그렇게 말해놓고 나중엔 없다며.”
병실을 나왔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가 휴대폰을 켰다.
새로운 알림은 없었다.
며칠 전 기록을 위로 올렸다.
문장들이 지나갔다.
우산.
출발 시간.
운동화.
민지.
그중 하나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틀릴까 봐 묻고, 남의 답을 따른 뒤 자신을 탓한다.
그 문장을 언제 처음 읽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화면을 껐다.
맞는 말이라서 더 싫었다.
한동안 나는 거의 묻지 않았다.
알람은 직접 맞췄다.
점심 메뉴도 직접 골랐다.
어느 날은 아침부터 된장찌개가 먹고 싶었다.
점심시간까지도 먹고 싶었다.
된장찌개를 먹었다.
맛있었다.
회사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한 정거장 전에 내려 걸었다.
누가 권한 것은 아니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려다가 그만뒀다.
확인하고 싶어서 확인할수록 더 불안해지는 일이 있었다.
다 안다고 말하면서, 설명해줄 사람을 찾게 되는 때도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걸음을 멈췄다.
어디서 본 문장 같았다.
정확히 어디였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다시 걸었다.
민지는 거의 이 주 만에 만났다.
“엄마는 괜찮으셔?”
“응. 다음 주쯤 퇴원할 거래.”
“다행이다.”
민지는 아이스티를 마셨다.
나는 커피를 마셨다.
한참 다른 이야기를 하다가 민지가 물었다.
“그거는?”
“뭐?”
“아직 써?”
“응.”
“많이?”
“요즘은 별로.”
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잠시 후 내가 말했다.
“근데 그 일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잖아.”
“무슨 일?”
“엄마.”
“응.”
“전화 받았어도 엄마가 쓰러지는 건 똑같았을 거고.”
민지가 컵을 만지작거렸다.
“그건 나도 모르지.”
“그러니까.”
“근데 나는 그게 틀렸다는 얘기 안 했어.”
나는 민지를 봤다.
민지는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냥 요즘 네가 뭘 물어봐도 바로 대답 안 하니까.”
“내가?”
“응.”
“언제?”
“뭐 먹을지 물어봐도 그렇고. 어디 갈지 물어봐도 그렇고.”
민지가 웃었다.
“내가 너보다 그거한테 밀린 것 같잖아.”
농담처럼 말했지만 완전히 농담은 아닌 것 같았다.
“미안.”
“뭘 또 미안해.”
민지는 빨대로 얼음을 휘저었다.
그러다 물었다.
“근데 너 행복해?”
나는 대답하려 했다.
그리고 휴대폰을 봤다.
아무런 알림도 없었다.
몇 초 뒤 고개를 들었을 때 민지가 나를 보고 있었다.
“설마.”
“아니야.”
민지가 웃었다.
“그것까지 물어보려고 했어?”
“아니라고.”
“알았어.”
민지는 더 묻지 않았다.
잠시 어색했다.
그러다 엄마 퇴원 날짜를 물었다.
나는 다음 주 수요일이라고 말했다.
민지가 시간이 되면 얼굴 보러 가겠다고 했다.
그 뒤로 우리는 다음 주말에 볼 영화 이야기를 했다.
헤어질 때 민지가 말했다.
“영화는 네가 골라.”
“왜?”
“가끔은.”
나는 알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동안 몇 번 휴대폰을 꺼냈다가 다시 넣었다.
남의 판단은 싫으면서, 스스로 정한 답은 더 못 믿었다.
그 문장이 화면에 있었는지 내가 생각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내가 처음 고른 것을 찾기 시작했다.
대학교는 내가 골랐다고 생각했다.
오래된 메시지를 찾아보니 엄마가 먼저 학교 이름을 보내왔다.
— 여기 정도면 괜찮지 않을까 — 이름도 알려져 있고 — 네 점수면 충분할 것 같은데
나는 이렇게 답했다.
— 나도 여기 괜찮은 것 같아
그 뒤로 학교 홈페이지를 여러 번 찾아본 기록이 있었다.
직접 설명회에 신청한 것도 나였다.
학교를 처음 알려준 사람은 엄마였다.
그래서 내가 고른 게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전공은 조금 달랐다.
가장 가고 싶었던 학과가 있었지만 점수가 모자랐다.
지금 전공으로 바꾼 것은 성적 때문이었다.
그런데 학교를 다니다가 재미있는 수업을 몇 개 만났다.
그 수업들을 신청한 사람은 나였다.
첫 직업은 채용 사이트에서 본 글에서 알게 됐다.
향후 10년 성장 가능성이 높은 직군 7
제목까지 남아 있었다.
글이 없었다면 지금 하는 일을 몰랐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몇 년 동안 계속 이 일을 한 사람도 그 글인지는 알 수 없었다.
민지는 신입생 환영회에서 먼저 말을 걸었다.
“여기 자리 있어?”
그게 시작이었다.
그 뒤에 먼저 연락한 날도 있었고 내가 먼저 연락한 날도 있었다.
싸웠다가 다시 연락한 적도 있었다.
그 모든 날을 처음의 한 문장으로 설명할 수는 없었다.
좋아하는 밴드도 민지가 처음 들려줬다.
대학교 때 이어폰 한쪽을 내 귀에 꽂아주며 말했다.
“이거 들어봐.”
나는 그날부터 그 밴드를 들었다.
몇 년 뒤 민지는 더 이상 듣지 않았다.
새 앨범이 나왔을 때 링크를 보내자 민지가 답했다.
— 너 아직도 얘네 들어?
나는 아직 들었다.
처음 좋아하게 만든 사람은 민지였다.
계속 좋아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아이스 아메리카노는 더 단순했다.
대학교 1학년 때 학교 앞 카페에서 내 앞 사람이 주문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주세요.”
내 차례가 왔다.
메뉴가 익숙하지 않았다.
직원이 물었다.
“뭐 드릴까요?”
나는 앞사람이 들고 간 컵을 봤다.
“저도 같은 걸로 주세요.”
그날 마신 커피는 써서 절반이나 남겼다.
그런데 다음번에도 같은 걸 주문했다.
언제부터 맛있다고 느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몇 가지를 더 떠올렸다.
책.
옷.
머리.
어떤 것은 누군가가 먼저 보여줬다.
어떤 것은 내가 찾아갔다.
어떤 것은 싫어했다가 좋아하게 됐다.
어떤 것은 좋아했다가 버렸다.
시작한 사람과 계속한 사람이 같은 경우도 있었고 달랐던 경우도 있었다.
하나를 고르면 그 앞에 또 하나가 있었다.
사람.
문장.
사진.
우연.
하지만 그것들이 내 선택을 대신한 것인지, 내 선택이 시작될 자리를 만들어준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기록을 더 내려보다가 익숙한 문장을 발견했다.
누가 한 말인지는 잊어도, 반복된 말은 자기 생각이 된다.
언제 읽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분명 화면에서 본 적이 있었다.
나는 한 번 더 읽었다.
잠시 뒤 화면을 껐다.
문장은 사라졌는데 문장의 모양은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반복된 말은 자기 생각이 된다.
나는 조금 뒤 이렇게 생각했다.
오래 남은 생각은 원래부터 내 생각이었던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멈췄다.
둘 중 어느 문장이 먼저였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휴대폰을 다시 켜려다 말았다.
처음부터 내 것이었던 생각을 찾고 싶었다.
그런데 이제는 질문 자체가 이상하게 느껴졌다.
처음부터라는 게 언제인지 알 수 없었다.
며칠 뒤 화면이 달라졌다.
출근 준비를 하다가 휴대폰을 켰을 때였다.
검은 바탕 가운데 문장이 하나 있었다.
사용 방식 재설정이 필요합니다.
아래의 버튼을 눌렀다.
몇 개의 안내가 지나갔다.
마지막 화면에서 손가락이 멈췄다.
앞으로도 선택을 위임하시겠습니까?
두 개의 버튼.
직접 선택
계속 위임
기다렸다.
화면 아래를 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추천이 없었다.
확률도 없었다.
십 초쯤 지났다.
그대로였다.
손가락을 버튼 하나 위에 올렸다가 떼었다.
“어느 쪽이 나아?”
대답이 없었다.
엄지로 휴대폰 옆면을 문질렀다.
한 번.
두 번.
몇 번을 더 문질렀다.
“내가 어떤 걸 고를 것 같은데?”
화면은 그대로였다.
냉장고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위층에서 무언가 바닥에 떨어졌다.
잠시 뒤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창밖으로 자동차 한 대가 지나갔다.
방 안이 다시 조용해졌다.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렸다.
화면의 밝기가 조금 낮아졌다.
검은 부분에 얼굴이 희미하게 비쳤다.
화면을 보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도 이쪽을 보고 있었다.
손가락은 두 버튼 사이에 있었다.
직접 선택
계속 위임
나는 두 개의 선택지를 오래 바라보았다.
어느 쪽도 나처럼 보이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계속 읽는 것을 권장합니다.